[잡지] 2008 김길후 개인전 |
희망을 그리다, 블랙 페이퍼의 작가 김길후
글 홍미혜
즐거웠던 유년 시절의 기억, 작가 나름으로 풀어낸 신화 등을 대형 화면 가득 그려내는 블랙 페이퍼의 작가 김길후, 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인당박물관의 기획으로 이달 6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전시를 연다
작가가 다루는 캔버스의 사이즈만큼이나 전시 규모가 크다. 5개의 전시실, 300여 점이 전시되는데 작품 사이즈가 작게는 150호, 크게는 1000호 이상이다. 어떤 것은 1000호짜리 세 점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작품의 사이즈에서 작가의 진취적 기상과 도전적 기질을 엿볼 수 있지만 화면 가득 형상을 그려내는 자유로운 붓질은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는 2년 전 갤러리 분도 초대전 이후 별다른 계획을 잡아두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루어졌다. 인당박물관의 전시실 공간을 생각하면 방대한 작업량과 스케일을 지닌 작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규모다. 전시된 작품은 300여 점이지만 전시장의 공간을 염두에 두고 400여 점을 더 준비해뒀다. 총 700여 점을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장으로 운반한 셈이다. 그렇다고 작업실에 먼지 묻은 작품들까지 모두 끄집어내 가져온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2003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풋풋한 작품들이다. 일주일에 한 작품을 완성한다고 봤을 때 1년에 50점, 300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번 전시를 위해서 5~6년 전에는 계획을 잡아야 할 전시라는 계산이 나온다. 갑작스런 전시 제의에도 선뜻 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그의 방대한 작업량과 성실한 그림 그리기의 결과이다.
하루 12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는 그는 빈 캔버스를 마주하고 한 점의 붓을 찍었을 때 섬광처럼 번득이는 영감으로부터 그림을 시작ㅎ나다. “계획된 그림은 인위적이어서 신선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다. 예술은 토크쇼처럼 자유롭고 살아있어야 한다.”며 즉흥적으로 그리는 이유를 말했다. 얼굴, 몸통, 팔, 다리 기본 정보만 지닌 화면의 대상들은 원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대형 작품을 두고 ‘걸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그림을 대책 없이 그리느냐?’는 식의 말들을 하지만 이번 전시는 항간의 의문을 풀어주는 듯하다.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근원적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통해 위압감을 받는다는 그는 “작품의 크기가 그런 위압감을 주기도 합니다만 그런 위압감을 줄 정도의 작품 스케일에 도전하고 남기는 것이 작가의 의무와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그런 작가의 의무와 책임이 그를 고집스런 도전과 호연지기를 부리게 한다.
1에서 3전시실까지는 캔버스 작업 종이 작업 설치 작업의 <비밀의 화원>이 전시되고 4전시실에는 신표현주의
<비밀의 화원>은 어린 시절 정원사가 꿈이었던 그의 유년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꽃을 좋아한다는말 그 이상으로 꽃을 좋아했던 그는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도 꽃에는 우산을 씌워주고 비닐봉투로 백합을 싸는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꽃밭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2003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화면 전체가 검정색 바탕임으로 말미암아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 ‘블랙 페이퍼(Black Paper)’ 블랙은 그의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다. “블랙은 죽음의 의지를 흡수할 수 잇는 유일한 색입니다.”라며 “인간은 참 부조리합니다. 희망을 품으며 내일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 내일은 죽음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희망이 있기에 내일을 기다리지 죽음을 기다리면서는 살 수 없습니다.” 부조리한 세상, 절망이 현실을 뒤덮을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블랙에서 희망을 읽는다.
그는 자신의 큰 그림이 웬만한 전시장에서는 걸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또 온통 새까만 색으로 칠해져 마치 뭉크 작품처럼 음침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좋아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세계를 계속해서 풀어놓을 것이다. 마치 ‘고도’를 하염 없이 기다리는 어리석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미련한 시시포스(Sisyphos)처럼 그것이 그가 말하는 희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