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11 갤러리터치아트 Deepest Black 김길후 개인전 ②

 

 

기억의 그림자 속을 거닐다 | 이대형 | Hzone 대표 &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

 

 시간이란 망각의 샘물을 마시며 살아야 하는 숙명. 모든 기억은 파편화되어 사라진다. 이는 분명 저주이다. 기억이 부서져 나간 자리에 다른 기억이 채워지지만, 이내 다시 부서져 나가고 다른 걸로 채워지기를 반복한다. 그나마 기억과의 조우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희망에 위안을 삼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이에 기록하고, 영상으로 녹화하고, 디지털로 압축해서 파편화된 기억을 보관하려고 발버둥친다. 좀 더 생생하고 견고하게 담아내기 위한 치열함이다. 김길후의 블랙 패인팅 시리즈 역시 그런 치열함을 감추지 못 한다.

 

 2001년 처음 접한 김길후의 그림은 어려웠다. 현대미술 이론을 전공한 필자였지만, 어떤 문맥과 어떤 비평적 프레임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꽃밭을 뛰어 노는 어린 아이 등 서정적이고 한국적인 풍경이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색채와 형상의 움직임은 스페인의 고야보다 어둡고, 독일의 펭크보다 과장과 왜곡이 심하고, ‘바젤리츠보다 거칠고 과감했다. 눈에 띄게 주제와 기법이 따로 노는 어울리지 않는 조화였다. 게다가 50여 점의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 색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화려한 그림들이 유행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의 블랙 페인팅은 일종의 변종이었다. 달라서 눈을 끌었으나, 눈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직 그의 블랙 페인팅의 속살까지 살펴보기에는 필자가 너무 어렸다.

 

 2004년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을 만났다. 이번에 검은색의 존재감이 위압감을 줄 만큼 거대해졌다. 밑그림 없이 단 한 번에 그려 내려간 필력은 여전했지만, 이야기 전달을 위한 절제된 표현은 세련됨을 더했다. 붓과 못, 조각칼로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검은색 안에 많은 다른 색상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획이 지나간 자리에 쌓이고 있는 다양한 시간의 층위가 그가 단순히 리얼리티를 재현하고 있지 않음을 암시했다. 옛 기억의 파편들을 복구하려는 작가의 의지는 작품의 제목과 그림 속 묘사된 상황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많은 걸 그려 보이지 않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토대로 김길후의 블랙 페인팅은 우울한 어둠을 벗어던졌다.

 

 김길후 그림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렸던 천진한 동화적 상상력을 환기시킨다. 특히 고집스러운 블랙 페인팅에 대한 집착은 온전히 옛 기억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적인 액션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액션은 스펙터클이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한다. 보통 스펙터클하면 수평적인 파노라마식 스케일을 떠오릴 수 있겠지만, 김길후에게 있어 수평적인 사이즈보다 중요한 것이 종적인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 낼 깊이이다. 작가는 그 깊이로부터 역사성을 발견하고 그 안에 스펙터클을 창조한다. 여기서 작가는 그 시간의 깊이를 어떻게 하면 더 깊이 끌고 내려갈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답을 어두움, 블랙, 그림자 속에서 찾는다. 자궁의 따뜻한 어두움에서 생명이 시작되듯이, 그래서 최초의 시각 경험이 어두움이듯이, 블랙이라는 컬러는 김길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색이 된다. 그래서 버릴 수 없는 재료이다. 그래서 김길후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또렷한 눈보다, 이미지 너머 깊이를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이 더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길후는 철저하게 고립을 즐기는 작가이다. 그것도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스스로를 고립시켜왔다 변방의 고수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자신감이다. 2010년 이후 김길후의 작업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해외 전시와 해외 필진들의 관심, 그리고 수많은 소통의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의 위치를 중심도 아니고 변방도 아닌 경계선에 올려놓았다. 작가는 그 경계선을 정치적인, 지리적인, 인문학적인 어떤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미래와 과거가 연결되는 통로로 해석하다. 그리고 미래를 과거의 그림자로 과거는 미래의 그림자로 해석하며 두 영역을 끌어안는다.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저항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래서 미래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과거로 갈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 역시 옆만 보고 나를 보지 못 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2013년 이후 김길후의 블랙 속에 빛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빛은 달빛과 닮았다. 이미지의 표면에 반사되어 형체르 드러내게 하는 빛이다. 형체를 그려가면서 동시에 형체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망막에 비친 감각만을 이용해서는 달빛이 만들어낸 고스트를 읽어낼 수 없다. 형체의 실루엣을 지워버리기 위해 김길후 작가는 맨손으로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물감 표면을 문지른다. 한 달, 두 달, 심지어 석 달의 시간 동안 표면을 문질러서 마들어진 아른거림으 확실하게 물리적인 무게감을 확보한 견고한 달빛이다. 김길후의 달빛은 이처럼 역설적 속성을 지닌다. 형상 속에 빛을 부여했고, 그 빛은 묵직한 물성을 생성한다.

 

 여백을 활용했던 이전 작업과 다르게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구도로 변화를 시도한 이 시기는 김길후 작가가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작업 공간을 옮긴 시점과 일치한다. 한국에서 변방을 고수해온 작가의 독특한 작업 태도는 중국에서도 이어진다. 2년 넘게 중국에서 작업하면서 중국어로 소통하는 대신 몸짓과 그림만으로 현지와 소통해온 것이다. 그의 고집스런 방식은 많은 오해를 낳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작품은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삶 자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바라보았을 때 더 많은 해석의 여지가 열린다. 그것은 회화가 미술사, 현대미술의 큰 맥락 속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블랙 속에서도 그의 황금색 달빛 속에서도 인간의 흔적과 삶의 괘적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듯 그의 검은색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을 회복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길후의 블랙은 주제이며, 재료이며, 공간이고, 동시에 철학이다.


A Stroll in the Shadow of Memory

Lee Dae-hyeong | President, Hzone & Absinthe Media Bar

 

 Time is the fate of having to spend one's life drinking from the spring of forgetfulness. All memories break apart into fragments and disappear. This is undeniably a curse. The space vacated by those fragmenting memories is filled by others, but soon those, too, crumble away and the cycle repeats as the space is filled with something else. All we can do is find some comfort in the hope that the encounter with memory might produce new meaning. Thus it is that people record things on paper or on video, frantically trying to compress them into digital format and keep the fragmented memories in storage. It is a feverish attempt to capture them in a more vivid and solid way. The black painting series by Kim Gil-Hu is likewise unable to conceal indications of this fierce struggle.

 

 When I first encountered Kim's paintings in 2001, I found them difficult. I had majored in modern art theory, but I was perplexed as to what context and critical frame I should apply in look- ing at them. The landscapes were sentimental and characteristically Korean, with children romping in flower gardens and so forth, but the coloring used to present it and the movement of the shapes was darker than those of the Spanish painter Francisco Goya, more exaggerated and distorted than those of Germany's A. R. Penck, coarser and bolder than those of Georg Baselitz. It was an unharmonious harmony, in which the play of theme and technique was conspicuously separate. Moreover, the artist had been relying on the single color of black from start to finish in some fifty or so works of art. At a time when colorful paintings were all the rage, Kim's black paintings were something of an anomaly. They drew attention with their difference, but they were not comforting to the eye. To be blunt about it, I was still too young to see the skin of the black paintings.

 

 I encountered Kim's work once again in 2004. This time, the black's sense of presence had become so massive as to seem overpowering. The brush strokes were as powerful as ever, laid down all at once without any rough sketches, but there was an additional sophistication in the restrained method of conveying the story. Through the method of adding depth to the canvas with brush, nail, and sculptor's blade, Kim had created many other hues within the black. The manifold layers of time accreted in the places where the large strokes had passed suggested that Kim was not simply representing reality. The artist's determination to recover the fragments of old memories was also readily apparent in the titles of the works and the situations depicted within them. He was therefore able to capture many stories without painting many things. And on the basis of those stories, Kim Gil-Hu's black paintings cast aside a melancholic darkness.

 

 Kim's paintings call to mind the innocent, fairy tale imagination forgotten by modern individuals. In particular, his stubborn fixation on black paintings comes across as a deliberate "action" taken purely with the goal of moving a bit closer to memories from the past. This action, in turn, launches a challenge at the very concept of "spectacle. " Ordinary, the word "spectacle" may conjure up some horizontal, panoramic scale, but with Kim Gil-Hu the important thing is not horizontal scale, but rather the depth created by the vertical accumulation of time. The artist discovers historicity within that depth and creates spectacle inside of it. Here, he comes to question how he might carry that depth of time down to an even more profound level. And the answer to this he finds within darkness, black, and shadow. Just as life begins in the warm darkness of the womb, and our first visual experience is therefore one of darkness, the color of black is the most fundamental for Kim Gil-Hu. As such, it is an element that he can never abandon. This is also the reason that appreciating Kim's paintings demands less our eyes and more the imagination to see the depth beyond the image. Kim Gil-Hu is an artist who thoroughly enjoys isolation.

 

 Here, too, he has isolated himself at the periphery rather than the center. It is a confidence well suited to the title of "frontier master. " His work has witnessed many changed since 2010. Through overseas exhibitions, the attention of overseas writers, and numerous occasions for communication, he has moved his position to the borderline neither center nor periphery. The artist does not view this borderline as anything political, geographical, humanistic. Rather, he interprets it as a channel whereby the future and the past are linked. He reads the future as the shadow of the past and the past as the shadow of the future, and he embraces both realms. In this, we can discern his resistance to dualistic thinking. Thus the question of whether to proceed into the future or the past is of no importance for this, too, is a contradiction, in which we look merely to our sides without seeing ourselves. In this way, the black in Kim's work faithfully performs the role of medium for the recovery of fragments of lost memory. In this sense, his black is at once a theme, a material, a space, and a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