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03 김길후 개인전 |
<등사잉크 가득 찬 밤>
김길후의 블랙페이퍼
미술사에서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1910~1920년 사이에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주로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며 그 감정은 아름답고 행복한 검정이라기보다 실존의 고통과 근원적인 불안 등 인간 존재가 세계에 처한 상홍에 관한 직간접적인 체험이다. 따라서 표현주의 작업에서 담고자 하는 심연의 불안과 고통은 조화롭고 매끄러운 선이나 고운 색으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왜곡돈 선이나 강렬한 색채를 빌어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주의는 분명한 개인의 이야기(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심하게 왜곡된 형상을 빌어 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존재의 상황과 심연의 한켠에는 눈물이 흐르고 어둡고 광포할 것이기 Eoanss에 표현주의 작업은 후미진 곳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인간 존재의 이해를 보다 넓히게 하고 또한 조형의 표현가능성을 넓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다.
김길후 작가가 한 밤 속에 길어 울리는 언어들, 즉 <등사잉크 가득 찬 밤>을 지나며 인쇄된 조형언어들은 매우 표현적이며 사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표현적이며 사적인 감정들은 개인의 기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가볍고 유쾌한 것들 속에 외면 받고 있는 우리 시대 존재의 무게를 환기시키고 있으며 여기에 작품의 우선적인 가치가 있다.
김길후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종이에 작업을 하고 아크릴 물감, 먹, 목탄, 금속재료, 석채 등을 임의로 섞어 어두운 색의 층차를 내며, 그리고 긁고 흘려서 형상을 만들어낸다. 둔탁하고 두껍게 지나간 붓자가 물감을 흘려서 씻겨나간 자국, 긁어서 거칠게 일어난 종이표면의 마티에르는 내면의 갈등 정도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작가의 조형적 어법이다. 검정색을 주조로 하는 이 블랙 페이퍼 작업이 <응시> 연작이다.
<응시>는 작가가 늘 혼자 그려두던 작업이었다. 제목대로 조용히 화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쏟아놓은 이야기이다. 다른 양식의 작품을 발표할 때 조차도 한두 점씩 제작하곤 해서, 창작행위의 맥락이 곧장 작품의 내용이 되어버린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김길후 작가는 다소 많은 양식의 작업을 발표해왔다. 한 가지만을 이어가는 것도 애달프지만 너무 산만한 이동 또한 애달픈 일이 아닌가.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것이나, 정주하지 못 하는 잦은 이동은 대부분 고립이나 소외의 정서 아니겠는가.
작가의 작업방식첢 블랙 페이퍼 작업이 다루는 내용이 불빛에가린 자아의 뒤안길이라면 <응시>는 회화의 뒤안길에 묻힌 조형언어를 환기시키면서 한 없이 가벼운 이 시대의 감성에 제동을 거는 것응로 받아들이고 싶다. 회화적으로 회화적인 것만으로 사회에 제동을 거는 것 편집증적인 내면 응시가 우리 모두와 관련된 무엇을 치고 지나간다는 것은 작품의 정서와는 달리 어떤 후련함을 가져다 주기까지 한다.
존재의 사회성이 잠든 한 밤. 달빛을 타고 흐르는 감정들은 대부분 극히 주관적이며 심약한 단면 그대로 드러나기에 개인적인 약점들이 여과 없이 표현되며 거칠고 우울하며 부정적이다. 김길후 작가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개별적 자아>라는 창을 통해 세게 속에 던져진 인간의 근본적인 감성을 툭 건드리며 거칠고 음산한 인간 형상을 빌어 조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동시대적인 것의 가치는 무엇보다 풍성한 이야기, 시끄러운 담론의 형성에 있다. 동시대의 숨결이 지나가면서도 지독스런 작가의 양식이 살아있는 작업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인 것 같다.
앞으로 작가의 과제는 비슷한 크기의 종이로부터 탈피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자신에의 집착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는 방법을 찾는 길인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이 둘이 아니듯이작가에게 재표의 선택과 변경은 작업의 내용과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가져야 하는데, 좋은 해법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서 이번의 블랙 페이퍼 작업이 변화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개인적 충족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진정으로 작가가 담기면서 너의 가슴도 치는 고유한 양식으로 오래 동안, 그리고 충분히 발휘되기를 바란다. 머무를 이유가 있다면 머물러서 아주 충분히 발휘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인숙 (갤러리M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