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18 송좡현대문헌미술관 '존재와 허무' 개인전 ① |
천개(天開)의 빛과 사람의 그늘
-김길후의 예술세계 -
1. 회화의 길 위에서, 예술의지(kunst-wollen)의 향방
김길후는 개성적인 ‘블랙 페인팅’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비교적 초기의 작품들은 검정색의 굵은 선묘로 유년기 정원에서 식물과 꽃과 곤충들과 더불어 살던 때의 인물 형상을 그려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은 강렬하고 감각적으로 압축된 선묘를 특징으로 하면서, 한편으로 종이를 칼이나 망치 등으로 뜯어내어 흑백의 대비와 잠재된 상흔과 같은 이미저리로 많은 감상자들을 매료시켰었다. 이때의 작품들은 유년기 기억이 주된 모티브로 작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년이 된 작가로서 겪어낼 수 밖에 없는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의 수많은 질곡 가운데서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염원과 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간적 고뇌를 느끼는 검은 얼굴의 ‘현자’와 ‘영웅’시리즈 작업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염원하는 높은 경지의 현자와 더불어, 중국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 동양의 정신을 담아보고자 시작한 민중 속 현자로서의 영웅 시리즈 역시 특유의 블랙 페인팅으로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초월적인 정신을 표현하는 물성의 표상으로서 검정색에 천착하였고, 검은색으로 형체를 그리면서 동시에 형체를 지우는 작업을 반복하는 가운데 현자와 영웅이 지니고 있는 진리의 깊이를 암시하였다. 축적된 마티에르의 감각적 깊이와 더불어 이 시기의 검은 형상 속에서 드러나는 달빛같은 은은한 빛은 현자가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검은색을 올리고 닦는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검은 색 위에서 빛이 올라온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에게 검정은 본래 있던 모든 색의 복합이자 외형에서 내면으로, 바깥에서 진리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는 불혹의 나이 이후 이전 작품들을 모두 파기하고 새로운 작업방향을 ‘깨달음을 닦는 과정’으로 설정하고 매진해오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이다...예술은 진리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여정에서 길어올린 수작들이 현자와 영웅 시리즈였다면, 최근의 작품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체험한 사람들의 희망과 그늘, 실존적인 자각을 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는 한때 이탈리아의 아씨시에 작업실을 두고 성 프란치스꼬의 거리에서 성자의 정신세계를 매우 암시적인 필치로 표현한 바 있고, 이후 촛불의 이미지로 천개의 빛과 인간 삶의 그림자를 그려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상적인 세계는 인간 삶의 현실과 그 그늘 속에 배태되어 있다는 자각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는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교수인 왕춘천의 기획으로 798예술구의 ‘화이트 박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포항 시립미술관의 <기념비적 인상> 개인전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간송 탄생 기념전 및 대구미술관의 기획전에 참여하였으며, 현재는 대구 동제미술관의 상설전시관 전속작가로 활동 중이다.
2. 회화 이후의 드로잉과 입체, 그리고 빛과 그늘
일반적으로 드로잉은 회화의 밑그림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김길후의 최근 드로잉식 회화는 2차원의 평면에 물감의 층위를 통해 사념이나 행위의 흔적을 드러내는 회화의 경계를 넘어 또다른 차원의 암시성이 강한 독자적 드로잉회화를 보여준다. 요컨대 ‘회화 이후의 회화’라고 할 만하다. 작가는 두터운 마티엘 효과의 물감층을 덜어내고 압축된 미세한 선묘와 최소한의 색만으로 매우 투명하면서도 깊은 상념을 표출해내고 있다. 블랙 페인팅의 기조를 지니면서도 분망한 선묘의 예민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는 서양화가이면서도 매우 동양적인 사유와 기법으로 회화의 요체를 표현해왔었지만, 최근의 작업에서는 여백의 울림이 더욱 돋보인다. 2014년, 서울과 베이징에서 뉴욕 페이스 갤러리 전속작가인 송동 화백과 2인전을 개최한 이후, 뉴욕 드로잉센터에서 김길후 드로잉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개인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모티브로 작업해오고 있지만, 그 중 <천개(天開)의 빛>이라는 토픽으로 이루어진 전시에서 촛불이 천지간의 빛으로 확장되면서 인간의 내면세계까지 조망했던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늘 추구해온 진리의 빛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전시에서는 <마음의 흔적>을 빠른 필치로 암시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인간적인 한계에서 도달하기 어려운 현자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의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실존적 상황과 <사람의 그늘>을 형상화한다. 빛과 그늘은 늘 양면성을 지니고 또 상대적이지만, 그늘을 통해 빛을 예상하고 희구하는 지상의 일이야말로 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읽혀진다.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는 사람, 고통스런 사람의 머리를 받쳐주고 있는 인물, 대화 중인 사람의 뒷모습, 남녀의 아픈 해후 등, 일상의 한 단면들을 속필의 선으로 표현하면서 최소한의 색으로 인물들의 심적인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 매우 섬세하면서도 응축된 필선들은 그동안 많은 색들을 다루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요체를 위해 탈색시켜온 화가의 내공(內功)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이 번에 전시될 작품들은 ‘회화를 관통하여 회화를 넘어서는’ 드로잉회화라고 할 만하다.
그는 주로 300호 이상의 큰 화폭을 선호한다. 표현 대상과 상황에 대한 이미지가 오랜 숙고 끝에 마음 속에 일종의 심상(心象)으로 각인되면, 그때 붓이나 나이프를 들고 아주 빠른 필치로 마음 속의 것을 화면에 옮긴다. 한 때 붓으로 선묘를 그리지 않고 예리한 칼로 화폭 전체를 잘라서 표현한 작품들을 보고 인상이 깊었었다. 그만큼 즉흥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오랜 숙고와 단련으로 매체를 다루는 재능과 솜씨가 연마되어 있는 작가이다.
3. 손의 사유(思惟)와 동서양의 경계를 넘는 조형감각
작가는 검정색을 주로 사용하지만, 한편에서는 원색의 아주 칼러풀한 작업을 병행하면서 색감정을 풀어내기도 한다. 이 번 전시 작품들은 블랙 페인팅의 기조를 보이면서도 주황색이나 노랑색 등으로, 하늘이 열리면서 지상에 흘려보내고 있는 빛, 이른바 천개의 빛의 메타포를 통해 사람의 그늘에 드리워진 상흔과 희망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문득 서양의 한 철학자가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은 머리로만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손으로도 사유한다”. 손은 몸의 유기적인 한 기관으로서 뇌의 전달기관만은 아니다. 때로는 손으로 하는 일을 통해 뇌세포가 발달하기도 한다. 작가는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실에 출퇴근하면서 작업만 한다. 그는 대구의 넓은 작업실에서 캔버스를 마주하여 늘 빠른 필치로 대형 캔버스공간을 점유해가곤 한다. 정신과 육체가 집중하여 전(全)인간적으로 관여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의 작가정신과 장인정신의 조화를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의 사유는 집중된 시간의 밀도를 분방한 선획의 흔적들로 풀어내 보여준다. 그는 아크릴과 먹을 함께 쓰기도 한다. 동양의 전통 재료인 먹은 수많은 색을 품고 있으면서 모든 형상의 근원을 드러낼 수 있는 질료이기도 하다. 작가는 일회적인 붓질 뿐 아니라 나이프 작업과 드리핑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대형 화폭의 우주적인 공간에 때론 성글고 때론 치밀한 선획으로 화면의 치진포세(馳進布勢)를 이루고 있다. 이 때 비워진 공간은 동양화론에서 말하듯, “붓에 앞서 뜻이 있고, 붓이 다해도 뜻이 남는다”(意在筆先 筆盡餘意)는 여백의 울림을 통해, 그려진 것 이상의 상(象)의 층위를 암시한다.
이렇듯 김길후는 서양화와 동양화의 경계를 넘어, 또한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도 넘어서서 작업하고 있다. 특히 이 번 전시에서는 검은색 인물 드로잉을 입체화하여 벽면이나 모서리 부분, 혹은 바닥에 함께 설치함으로써 회화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다 쓰고난 물감통들을 쌓아올려 그 위에 검은 색으로 드로잉한 사람들의 얼굴을 올려놓은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작가는 전시공간을 한 캔버스의 공간처럼 해석하여 평면과 입체의 조율을 도모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예 작가로서 이 번에 개최되는 중국 현대미술관의 개인전이 또다른 소통과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장미진(미술평론가,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과정 예술학 전공 교수)
LIGHT FROM HEAVEN AND SHADOWS OF HUMANITY
THE ARTISTIC WORLD OF KIM GIL-HU
Jang Mi-jin
1. Moving Toward Kunstwollen (Will to Art) on the Path to Painting Viewers may be familiar with Kim Gil-hu's characteristic black "lacquered" paintings, but his recent work has employed scribbled line drawings to depict the plants, flowers, and insects from the garden in his childhood home and people from that period in his life. These artworks condense intense emotion into the character of the lines. In his works on paper, he tears at the paper with a knife and a hammer, using the contrast between black and white, as well as imagery akin to latent scars, to draw the viewer in to investigate. Kim began making works stemming from childhood memories in response to his experience of the countless restraints of everyday life and human relationships as an artist and as an adult. These works explore his hopes for an ideal world and anticipate a spiritual cure.
In his later work, the sages (saints) and heroes with black faces feel human suffering, even though they live in the realm that humanity ultimately hopes to reach. After he moved his studio to China, Kim Gil-hu attempted to blend the Eastern spirit into his Heroes series, in which there are sages and saints among the masses. This distinctive black and white lacquer series has received widespread attention. Kim uses material expressions that transcend the spirit, straining the interpretation of the color black. Repeatedly painting forms in black and wiping them away is a metaphor for the depth of the truth for sages and heroes. The depth of the layered textures and the indistinct, almost moon-glow light emanating from the black forms represent the hopeful news of the sages. As Kim has said, "I apply black, then I wipe it off in a process that I constantly repeat. Just as dripping water can penetrate stone, light can shine through a black image. " For him, black is the union of all the colors in the world; from exterior form to interior worlds, it is the starting point for a journey from the superficial world toward the truth.
After Kim turned forty, he abandoned all of his previous works. He set an entirely new creative direction to explore enlightenment, then mustered his courage and set off toward that goal. He said, "I am pursuing an eternal truth that transcends time. . . Art is an endless love of the truth. " His journey in pursuit of truth has resulted in a group of outstanding works: Sages and Heroes series. The majority of his recent work presents the hope and protection found in everyday life, and actual self-realizations.
He established a studio in the Italian town of Assisi, and he depicted the streets walked by Saint Francis with extremely suggestive brushwork, expressing the saint's spiritual world. The paintings with candles depict the first ray of light from heaven at the birth of the universe and the shadows in human life, thereby forming a contrast between the reality of human life in an ideal world and the self-realization that is always forming in the shadows.
2.Post-Painting Monochrome Black, Three-Dimensionality, Light, and Shadow
Generally speaking, monochrome paintings are considered drafts for other paintings. However, Kim Gil-hu's recent monochrome paintings are two-dimensional, and through the layering of paint, he reveals traces of thought or action, transcending the limitations of painting and presenting extremely suggestive but also immensely creative monochrome painting in another way. This could be called "post-painting painting. " Kim did away with the textured effects of painted layers, using succinct and penetrating line and minimal color to reveal transparent yet deep emotion. On a black lacquer ground, the sensitivity of the disorderly lines makes the work even more eye-catching.
Kim has held numerous solo exhibitions on a diverse array of creative themes. In Light from Heaven, he used candles to present light in the world, expanding and examining the interior world of humanity. These works have made a deep impression. He has always fanatically pursued the light of truth, which is plainly revealed in his work. However, in his recent exhibitions, Traces of the Soul brings the metaphor into his creative style with rapid brushwork. Shadows of Humanity depicts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real scenes in representational forms but does not present humanity's limitations or inability to reach the realm of the sages. Light and shadow will always exist in opposition, but from the presence of the shadow, you can assume and hope for the light, and perhaps it is only in this way that humanity can see through things around them. He presents people curled up coolly observing the world, people soothing their pain with their head in their hands, from everyday life. He paints lines with quick strokes, using the smallest possible silhouetted figures in dialogue, men and women sadly meeting, and other scenes number of colors and suggesting the monologues in the figures' inner worlds. These very fine, concentrated lines reflect Kim's elevation of painting technique and deeper comprehension of black. His previous excellence in rich color gradually shifted toward a use of black. The artworks presented could be considered monochrome paintings that “incorporate yet transcend painting.”
He prefers paintings three meters or taller, and he spends long periods of time considering how to express the subjects and scenes in his mind. An image is imprinted on his mind, then he uses a brush and a knife to make extremely rapid strokes, transporting the images from his mind to the canvas. Sometimes, he does not use a brush to delineate the forms; instead, he uses a sharp knife to cut the canvas open, which deepens the expressiveness of the work. This seemingly impromptu series was actually created after a long period of consideration and refinement; using brilliant talent and technique in his chosen medium, Kim applied the forms from his mind to paper.
3.Thinking Hands and Formal Perceptions that Transcend the Limitations of Eastern and Western Culture
Kim primarily uses black, but he has parallel works using rich primary colors, liberating the emotional symbolism of the colors themselves. Although the works of art exhibited here seemed to have a black lacquer base, he also uses orange and yellow, opening the heavens to show light flooding the ground. Through the metaphor of the heavens opening, he appropriately expresses the traces of thought and hope in the human shadows. Looking at his work, an idea from a Western philosopher suddenly springs to mind: "Humanity does not just think with the mind; humanity also thinks with the hands." As one of the organs of the body, the hands do not simply receive signals from the brain; the use of the hands promotes the generation of brain cells.
When Kim is in the studio, he works from morning to night without a break. In his spacious studio in Daegu, he faces the canvas, occupying it with quick strokes. He is fully present, unifying the body and soul, and we can see that he has merged the spirit of the artist and the artisan. The artist's thinking hands reflect the dense concentration of time, liberating traces of unrestrained painted lines. He uses acrylic paint and ink together, even though ink is a traditional Eastern painting material that has tens of thousands of shades and could be the source of all forms. Kim does not mastering the seemingly universal expanse of space in the work; the painted lines simply use a brush to paint; he also uses a knife and a sprinkled painting technique, are both innocent and meticulous in their placement on the canvas. Eastern painting theory would describe these empty spaces as: "The concept exists before the brush moves, and the concept exists where the brush does not touch. " These voids are metaphors for a higher realm, one beyond painted form.
In this way, Kim Gil-hu's work could be considered to transcend the limitations of Western and Eastern art, as well as the limitations of monochrome works and painting. In this exhibition in particular, the three-dimensional black figures are placed on walls, in corners, and on the floor, in an attempt to infinitely extend the painted space. One of the works that particularly draws the eye is the pile of paint cans with a black monochrome face. Here, Kim interprets the exhibition space as a large canvas, in an attempt to achieve a perfect harmony of the two-dimensional and the three-dimensional. Kim Gil-hu is a top artist in the South Korean modern art world, and we look forward to a new opportunity to experience developments in his work at this Songzhuang Contemporary Art Archive solo exhibition.
(Jang Mi-jin: Art critic and Ph. D. adviser and professor at Daegu Catholic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