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19 김길후 개인전

 

 


 

| 전시서문 (미술의 임상실험실 갤러리에무 기획초대전) 김길후展을 열며

 2010년 11월 복합문화공간에무가 오픈한 이래로 거의 10년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람의 인생으로 따지면 이제 막 소년에 접어 든 나이에 불과하지만 그 동안 수많은 전시를 거치며 이 시대 가난한 예술가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복합문화공간에무는 예술적 권위를 내세운 엄숙한 작품보다는 웃음과 기지가 넘치는 작품을 중시한다. 허영의 시장이 된 예술과 사교장화 된 표현공간에 좌절, 분노, 항의하는 예술가들에게 이 공간은 열려 있다." 처음 이 공간이 개관되었을 때 말이며, 지금도 하나의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제와 더불어 함께하는 지금,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 또는 도인이 나타나 "아무것도 없다! 꼭 뭔가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대답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당장 우리를 존재케 하는 살아있는 에너지를 느끼고 있지 못함이 불안감으로 엄습했다.

 에너지, 살게 하는, 당장 먹을 수 있는 밥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걸 체감했다. 물론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권위로 군림하지 않고, 허영의 시장이 아닌,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른한 감상에 멈추지 않는다면 예술은 항상 현재의 불편한 진실을 자극하거나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 공간에서만큼은 말이다.

 복합문화공간에무 기획초대전은 공간에 대한 신념에서도 밝힌바 보다 명확히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인간과 시대를 거침없이 말하고, 새로운 세계를 주장하는 작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려는 것이다. 따라서 기획초대전에 초대되는 작품들은 구작이 아니라 늘 신작이어야 한다. 정착화된 작품이 아니라 동시대에 생생하게 반응하며 움직이는 작품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길후는 우리가 찾아 만난 첫 번째 작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연히 만났다.) 그와의 만남의 과정을 여기에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나중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자리가 생긴다면 이상하고 야릇한 에피소드를 소개할 것들이 많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좀 당황스럽고 황당한 이야기들이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지나친 감상주의에 빠진 시대를 비판합니다. … 한줌의 도덕! 그것으로 통제되는 사회! 도덕은 단지 정해놓은 것들의 질서일 뿐이죠. 그렇다면 정해져 있지 않는 세계는 어찌할 것인가? … 예술은 정해놓은 질서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세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회화의 본질. 재현의 본질. 그림. 그리움의 본질. 본질은 본향을 연상시킵니다. 본향은 떠나온 과거의 고향과도 같은 곳인가? 미래로 다가가는 미지의 세계인가? 본질, 본향에 다가서기 위해 계획된 것이 결국에 망쳐버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말이 두서 없다고 생각하기보다 뭔가 감각적으로 비수를 꽂는 것 같은 말들에 주목해 보기로 했다. 마지막 문장이 매력적으로 들렸다. “결국에 망쳐버려져야 한다는 생각” 그의 어법처럼 나도 그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결국에 망쳐버려져야 한다!" 재현을 위해 생각하는 것, 마음에 담에 두는 것, 계획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그 당연한 노력만이 본향으로 들어가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수십 만 번 시도한 바로는 그 본향의 생생함을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재현된 것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보태진 감상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필요충분한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예기치 않게. 던지듯. 잠자듯. 홀린 듯. 그려진 그리움의 본질이 내 눈앞에 다가 서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물론 그에게만 한정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작가 김길후는 모든 계획된 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떤 법칙1)처럼 계획에 준한 결과물은 감상적 자기 연민 그 이상을 말하지 못하며, 유리처럼 깨지기 쉽고, 시간이 지나면 곧 무너질 매우 허약한 것들이라고. 일부러 망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지 않은, 우연히, 무심코, 나도 모르게 한 질서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에게서 드러나는 형상은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보일지 모른다. 어떤 구체적 형상을 먹어치운 또 다른 신체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 형태는 기표와 기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냥 어떤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그렸지만, 인간이 아닌,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과도 같은, 무질서 속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질서를 이탈하려는 화가의 몸짓이 느껴지는, 그는 질서와 무질서,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마치 줄타기를 하는듯하다.

 "탱탱해야 한다!" 그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다. 마치 줄타기를 하는 사람(화가)의 긴장된 상태를 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팽팽히 당겨진 상태의 줄(작품)을 말하려는 것이지 확실치는 않지만 이 말에 덧붙여 빼먹지 않고 하는 말은 "자신의 관심은 휴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현생의 일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홀린 듯 그의 말을 듣고 나면 그는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봐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들린다.

 ......따라서 나의 작품은 감상자의 경험에 준한 감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현재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시 같은 것이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는 각자가 곧 만나게 될 미지의 세계에 두려움 없이 직면해 주길 바랍니다. 과거일수도, 현재일수도, 미래일수도,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양자세계의 불확정적인 상태와 같은 진짜 현재에 집중해 주길 바랍니다. 그 진짜 현재 상태를 그린 것이 저의 그림이며, 당신 역시 한 줌의 도덕, 정해진 세계에 갇혀서 나른한 감상에 빠져들지 마시길 바라며........

 작가 김길후의 작품의 탱탱함이란 예컨대 엔트로피 지수가 질서의 경계점에서 항상 출렁거리는 상태를 표현한 말 같다. 그 상태가 새로운 변화의 변곡점이며, 그 상황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매 순간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예기치 않게. 던지듯. 잠자듯. 홀린 듯. 번쩍 들어온 에너지 덩어리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데 잠시의 여유도 부리지 않는다. (참고로 그는 꼭 필요한 만남 이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만 그린다. 마치  증권회사 펀드 매니저가 쉬는 날 빼고 주식현황판에 눈을 떼지 않고 있듯.)

 자, 이쯤해서 그와 그의 그림에 대한 나의 소견을 멈추고, 그의 작품을 직접 대면해 보시는 것이 최선일 듯싶다. 그의 느낌처럼 당신도 느낄 수 있는지… 덧붙여 앞으로 복합문화공간에무 기획초대전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그동안 거리를 두고 산책하며 보는 작품들 보다는 당신의 감정을 흔들며 세상에 직면하는 작품들을 만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보겠다.
김영철 (기획초대전 큐레이터, 갤러리에무 부관장

 


  

| 전시평론 유령을 먹어치운 신체 

 "시공을 초월치 못해 구작의 느낌이 듭니다. 명작은 시공을 넘어 탱탱해야 합니다." 휴대폰 사진 파일에서 김길후 작품 옆에 내가 모르는 어떤 그림이 보여 혹시 그의 작업실에서 찍은 것인지를 물어본 것에 대한 야멸찬 문자였다. 한 마디로 그런 그림은 안 키운다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여기에 작가의 그림관이 고스란히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공을 초월하는 것은 유령의 영역이다. 여기서부터 내 고민은 시작됐다. 유령은 탱탱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러기는커녕 액체나 기체 성질에 가까운 투과되는 존재다. 문제는 실제로 김길후의 유령이 탱탱하다는 데 있었다. 

 탱자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울타리가 탱자나무였는데, 탱자로 짓궂은 장난을 많이 쳤다. 머리를 탱자로 맞으면 돌멩이처럼 아프다. 김길후의 유령은 심지어 날아오는 탱자를 단칼에 베는 검객일 정도다. 유머를 섞어 말한다면 무당파에서 단련된 신체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더하여 몇 작품은 그 신체 가까이 비수 같은 하얀 번쩍거림이 눈을 끄는데 화폭을 예리하게 찢어놓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탱탱함을 넘어서서 자해공갈단 수준이다. 뒤에 부연하겠지만 이 날카로운 칼 혹은 칼질은 현재 그의 작품세계에서 유령과 탱탱한 신체가 겹쳐지면서 동시에 비어있는 즉, 不一而不二의 역할을 한다.

 이제 좀 정리해보자. 작가는 유령과 탱탱함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한 걸까? 작품 속 인물이 유령을 먹어치운 것이다. 그 식사 행위는 흔히 정신이 접신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신체에서 일어났다. 마치 공동제사를 통해 곰을 먹어치운 우리 조상들처럼. 곰은 먹힌다는 조건 하에서 신이었고, 곰은 이 공동식사 과정을 통해 영원히 신이 되었다. 원시인들은, 신을 먹고 그 신이 인간의 신체를 강건하게 해주리라는 믿음과 더불어 신은 더 많은 살과 강한 뼈를 가지고서 다시 이 세상에 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을 위해서. 풍요제의 기원인 것이다. 여기서는 정신이 신체와 구별되지 않았다. 정신은 곧 신체였다. 

 김길후의 주인공들은 이 원시문화의 살해 전통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승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는 불명이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것 같다. 만약 그 주인공이 돼지를 먹었다면 돼지는 신이어야 할 텐데, 어떤 얼굴로 그려야 할까? 저 옛날 동일한 행위를 한 원시부족은 가면을 쓰고 얼굴에 칠을 했다. 그때라면 그렇게 그리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의미, 전혀 다른 상징이지 않은가?

 이 이중성 ― 원시적 분장(얼이 들어있는 '얼굴'/근원성)을 향한 충동과 현재적 분장('페르소나'/가식성)을 짓뭉개고자 하는 욕망 ― 사이에서 작가는 후자를 실현하고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 이중성 사이에서 폭발하는 기운(氣)으로 정체불명의 형상 ― 유령을 먹어치운 신체를 그려내고 있다. 아니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나아가고 있다.

 원시미술은 시공을 초월한 사차원을 운용했다. 그건 신과의 관계(신을 먹고 신에게 먹히는) 속에서 가능했다. 유령과 관계를 짓는 김길후의 작품도 사차원에 존재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붙어있는 시간과 공간'이 절단돼 있는 '단면' 들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단면 속 그 신체는, 무게가 아니고 질량으로 다가오며, 그리고 (뉴턴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의 중력으로 빨려들게 한다. '무게'는 장소에 따라 다르나 '질량'은 지구의 1/6밖에 안 되는 달에서도 같다. 질량을 그렸다는 것은 장소 이동이 자유로운 신체인 것이다. 그는 또, 그 단면에서 '시간의 분절'을 (운동의) 정지가 아닌 (일의) 중지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을 초월한다. (일을) 중지하면 현시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의 성질이다. 나는 김길후의 초월을 '트랜스'적 성질로 읽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110볼트(A)를 트랜스에 연결해 220볼트(B)로 출력할 때 전류는 트랜스를 통해 A에서 B로 변환한다. A를 3차원세상이라 하고 B를 4차원이라 하자. 트랜스를 통한 B로의 변이(초월)는 A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A를 필요조건으로 초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방식을 초월이라 부르지 않고, 그럼 무엇을? A를 절단하고 B로 순간이동 해서 저차원의 A를 내려다보며 불쌍히 여기거나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나 예수가 '이 세상 A'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B라는 높은 세상'을 여기 A에 세우기 위해 '싸우고 사랑하는' 이것이 트랜스적 초월인 반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율법을 전해주는 모세는 현재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초월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 권력이며 상징적 권력이다. '유혹'과 '폭력'에 의해 현실에 통용되는 '가짜'이며 그 가짜를 진짜로 보이게 하는 '상징'인 것이다.

 모세가 초월자라고 한다면 인민은 복종하는 자요 자유가 없는 노예다. 모든 비현실권력(상징권력)이 모세적 초월을 선전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전제주의든 자유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서두에 말한 원효의 '화쟁'도 트랜스적 초월이다. 김길후의 형상은 '여기'(현실차원)와 '저기'(우주차원)가 겹쳐 있는 부분에 있다. 겹친 그 부분이 '트랜스'다. 그러나 트랜스 된 이 자(형상)는 그러나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화쟁하기에는 스스로를 먹이로 내어주고 있지 않다. 유령을 먹었으면 유령에게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 교환관계가 이루어질 때 관객은 감상을 넘어 그 형상의 파괴력을 체감한다. 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먹혀지는 형상 그것도 겹치는. 유령에게 먹히는.

 유령에 대한 유럽사회의 에피소드가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하나의 유령에 대해 선언했다. 잠시 들어보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었다.

 오늘날도 어떠한 형태로든 신성동맹(다른 말로 하면 모세동맹)은 God Father이자 Big Brother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전히 유령이다. 아니 유령을 먹어치운 신체고 유령에게 먹어치워진 신체다. 이 사정을 문자로 습득하지 않은 작가 김길후는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의 흐름에 어느덧 몸이 실려 있음으로 해서 그 지점을 향하고 있다. 고온에서 저온으로 가는 흐름상 그 뜨거운 열에너지는 붓질을 통해 좀 더 차가운 형상을 창조하는 중이다. 김길후의 작품사(史)와 관련해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보면, 그는 이와 기로 비교할 때 '기'의 예술가다. 이가 구심력(중력)이라면 기는 원심력(관성력)에 해당할 것이다. 관성력(원심력)은 타율적인 것이다; 외부의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생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외부의 힘에 저항함으로써 생기는 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가 스스로 자유분방하다는 착각의 상식은 이제 소거돼야 한다. 자유분방한 기의 분출은 저항의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질량이 생긴다. '무질서도'로 번역되는 엔트로피는 자연현상에서 유일하게 에너지의 방향을 알게 해준다. 난 그 방향을 공(空)이라고 생각한다. 공은 무질서가 질서에 먹히고 동시에 질서가 무질서에 먹히는, 도상으로 표현하면 '무극(태극)'일 것이다. 

 김길후는 최근에 식물과 특히 나무에서 우주 섭리가 자기의 몸속으로 훅 들어온 것을 체험했다고 한다. 세계체제도 바뀌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변화에 응하는 기/관성력이 어떻게 그 체험으로부터 캔버스로 옮겨질지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그의 ‘형상’이 유령에 먹혀지는 '동시성'이 일어날지도. 

김영종 (작가)
<참고>
[공지]2019 복합문화공간 Emu 평론 스크랩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