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06 김길후 개인전

2006 갤러리분도 GALLERY BUNDO 

Man with flower 김길후展  2006.05.03 ~ 2006.06.03 

 

 

 

비밀의 화원-유년의 화원, 그 지독한 성장통을 내장하다

 고충환(미술평론)


 현대인은 좌표 상실의 질병을 앓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종래에는 자기조차 상실하는 결여와 결핍의식이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의식과 자의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현대인의 질병을 고향의 상실로부터 비록된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고향은 실질적인 지리적 의미이기보다는 일종의 원형의식에 가깝다. 그러니까원형, 뿌리, 본질에 해당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통 암울한 비전으로 가득한 김동기의 그림은 이러한 결여의식과 결핍의식, 고향과 원형에의 상실감과 맞닿아 있다. 물론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비전이겠지만, 그림들이 드러내 보이는 존재론적 상처나 자의식은 저마다의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적 자아와 대면케 함으로써 보편적 언어를 획득하고 있다.

 

무의식적 자아와 대면하다.

 

 김길후의 그림은 대략 된 블랙 티어스 연작(2003년 전후로 집중적으로 제작), 비밀의 화원 연작(2005년 전후로 제작), 그리고 2008년 최근의 소위 칼 드로잉 연작을 구별해볼 수 있다. 이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구별일 뿐 그림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이나 주제의식 면에서는 서로 내통하고 있다. 그러니까 블랙 티어스 연작은 종이에다 망치로 드로잉 하듯 그린 그림으로서, 어두운 화면이 불러일으키는 암울하고 격렬한 내적 파토스와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이 어필돼온다. 그리고 캔버스에다 붓으로 그린 비밀의 화원 연작은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정적이고 관조적인 인상이 짙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방식으로부터 우회적이고 은유적이며 암시적인 방식으로 변화했다고나 할까. 근작은 주로 드로잉의 감각이 두드러져 보이며, 이로부터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고드는 강력한 호소력이 느껴진다.

 

 비밀의 화원에서 작가는 자신을 꽃들 중에서도 특히 백합과 동일시하는 한편, 이를 통해 유년시적에로의 회귀를 감행한다. 특히 두 연작이 내용이나 주제 면에서 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데, 이를테면 비밀의 화원은 사실상 유년의 화원으로서 일종의 성장통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 증상이 불러일으키는 암울한 비전이 심연과도 같은 블랙티어서 연작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반면 칼 드로잉 그림에서 엿보이는 섬세하고 장식적인 인상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작가의 여느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다.

 

 김길후의 그림에는 이처럼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내면으로 숨고자 하는 자아가 그려져 있는데, 이때 그는 모든 현실원칙으로부터 벗어나 무의식적 환상에로의 도피를 감행한. 여기에는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자기가 자기를 보는 일종의 자기반성적 과정이 덧붙여진다. 의식적인 자아가 무의식적인 자아와 대면하고, 현실의 자장에 속해있는 자기가 현실원칙에 의해 밀려난 억압된 자기와 만난다.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의식적인 아나와 무의식적인 자아로 분리되는 자기소외현상이 중첩돼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외현상이나 반성적 과정과 관련된 그림들 가운데 특히 손에 식물의 구근을 들고 물에 반쯤 잠겨 있는 자화상이 눈에 띤다. 여기서 식물의 구근은 에로스 즉 삶의 충동을 상징하고, 검은 물은 타나토스 즉 죽음충동을 암시한다. 이로써 삶과 죽음의 귀로에 선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검은 물 같은 조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누구든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다만 현실원칙과 타협함으로써 애써 그 실체를 외면하고 있을 뿐.

 

 또한 검은 물은 자기 반성적 계기로 이끄는 거울이며, 그 물거울이 나르시스의 샘과 동일시 된다. 주지하다시피 나르시스가 샘에서 발견한 것은 자기가 아닌 타자의 얼굴이며, 아기가 거울을 보고 웃는 것 EH한 자신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서 움직이는 형사에 반응하기 따름이다. 나는 결코 나의 실체를 볼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나를 통해서 다만 나와 다른 어떤 조재를, 나를 빼닮은 어떤 존재를, 그리고 유혹적인 만큼이나 죽음의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도플갱어를 대면할 수 있을 뿐이다. 자살을 암시하는 작가의 여느 그림에서는 자기의 분신을 단죄하고 엄벌하고 마침내는 죽이기조차 하는 심리적 징후가 느껴진다. 목에 밧줄을 걸고 죽어가는 나의 죽음에의 비전이 나의 분신인 백합꽃을 손으로 비틀어 꺾는 행위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잇다. 내가 유년의 화원에서 불러낸 백합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처럼 비극적 종말을 화려하게 장식해줄 따름이다.

 

 이 죽음에의 유혹, 이 지독한 성장통, 이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치열한 자의식은 미학과 예술이 만들어준 상상력과 비전이 아니라면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마구잡이로 북북 그어댄 듯 흘러내리는 비정형의 얼룩이나 스크래치, 이를 통한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으로 간신히 드러나는 형상. 이 일련의 암울한 그림들을 작가는 종이에다 망치로 그리는데, 주로 작은 손망치의 장도리 부분의 날을 옆으로 세워서 그린다. 섬세하고 속도감이 느껴지는 세선이 두드러져 보이고, 판화에서의 표면요철효과마저 느껴진다. 이로 인한 비정형의 얼룩과 스크래치가 내면의 상처를, 존재론적인 상처를 연상시킨다. 형상을 그려놓고 재차 그 위에 붓질을 가해서 그 형상을 지우는 것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무로 되돌려 놓으려는 의지의 표현이거나, 자족적인 존재감이 박약한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망치로 드로잉 하는 과정 중에 때론 안료 층 이면의 종이가 너덜너덜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그 자체 어두운 화면과 대비되는 조형적인 효과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진 작가의 심리적 정황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로써 블랙 티어스 연작은 단순히 형식적인 요소나 그 특질에 중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그 자체 심리적 표상으로 일컬어질 만한 내면적 초상을 내장하고 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 불가능한 욕망을 표출하다.

 

 김길후는 유년시절에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온갖 화초들을 가꾸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원예전문가를 꿈꾸기조차 했다고 하니 작가의 꽃에 대한 사랑과 조예가 남다를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린 그림이 비밀의 화원 연작이다. 비밀의 화원 연작은 말하자면 블랙티어스 연작에서의 존재론적 상처와 자의식을 치유하기 위해 불러들인 유년의 정원이면서, 이와 동시에 현재의 이상이 투사된 가상의 정원인 것이다. 꽃과 남자 연작으로도 알려진 이 시리즈 작업은 캔버스에다 붓으로 그린 그림으로서, 종이에 망치로 그린 블랙티어스 연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정적이고 관조적이다. 그 이면에서 유년의 정원 혹은 화원에로의 회귀 본능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체 일종의 원형의식과 맞닿아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어른이 되기 위해 접었던 것들을 불러일으킨다.(자크 라캉에 의하면, 유아가 자족적인 상상계로부터 언어와 기호가 지배하는 상징계로 건너가기 위해 타협하고 포기하고 억압한 것들)

 

 형식적인 면에서 일련의 금속성분 즉 철, , , , 산화철, 진주가루, 등을 연한 젤에 섞어서 엷게 여러 번 칠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주로 검정색이나 회흑색의 화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암울한 화면 한가운데로부터 은근하게 빛을 발하는 발광효과가 특유의분위기를 연출하다. 이때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빛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에서 유쾌한 심상의 질감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김길후의 그림을 특징짓는 것은 형식적인 특질보다는 내용적인 측면이다. 그림에서 작가는 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편, 여타의 자연에다 스스로를 동화시키고 있다. 발기한 성기를 그대로 노출시킨 천진난만한 모습에서는 문명의 옷을 벗고 자연인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읽히는가 하면, 몸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것에서는 자신의 몸을 꽃들에게 숙주로 내어줌으로써 자연과의 동화현상을 실현한다. 꽃 중에서도 특히 백합은 순수함으로 인해 유년의 자아(혹은 잃어버린 원형)를 상징하며, 하얗고 투명한 속살의 질감이 여성을 암시한다. 작가는 발기된 성기를 스스럼없이 꽃잎에다 들이대기도 하고, 머리만큼이나 큰 꽃잎 속에 손을 집어넣기도 하고, 심지어는 꽃을 먹기도 한다. 더불어 물고기 혹은 새 형상으로 대체된 눈에서는 아마도 물고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뭍과 물이 다르지 않고,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하늘과 땅이 같은 것임을 주지시키는 듯하다.

 

 이렇게 비밀의 화원 연작에서는 은어들처럼 세월의 기슭을 거슬러서 유년의 시절로 되돌아가고픈 무의식적 욕망이 읽히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인 키덜트 현상이 감지된다. 역설적으로 이중섭의 동화적 판타지가 사실은 고단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듯, 작가의 환상 역시 동화적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을 증언하다. 일종의 반어법으로써 부조리한 삶을 극화하고 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비록 작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추상된 동화적 판타지를 재현한 것이지만,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림이 주는 환상이나 심리적 외상을 의식하고 있는 탓에 쉽게 공감을 자아내고 보편성을 획득하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암시적인 표현을 위해 불러낸 유년의 정원은 블랙티어스 연작에서의 트라우마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존재론적 상처의식과 자의식을 환기시킨다. 그것이 되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 불가능한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온통 회흑색의 화면이 암울한 정서를 자아내며, 인간 일반의 실존적 위기의식과 자의식을 테마로 한 부조리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내적 파토스의 즉물적인 표출에 연유한 표현주의와 주정주의를 넘어,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인간의 자기반성적 경향성을 엿보게 한다. 이로써 무의식적 자아에 내장된 어둠 자체와 대면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