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5] 2016 주름인가 지혜인가 - 한겨례 |
김길후 작가의 대작인 ‘현자’(2014).
인간의 얼굴 위로 고뇌를 표상한 상처 같은 선들과 붓질이 뒤덮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도판 포항시립미술관 제공
검은빛 화폭 속에서 생채기 투성이의 얼굴 하나가 육박해온다.
김길후(56) 작가는 세파를 맞으며 화석처럼 굳어진 현자(賢者)의 거대한 얼굴을 그린다. 끝없이 물결치는 번민과 고뇌가 칼자국처럼 패인 수많은 선들이 되어 얼굴 위를 난무하지만, 석불마냥 표정은 먹먹하다. 작가의 얼굴상들은 실존적인 부조의 형상처럼 보인다. 호분을 붙여 굴곡지고 단단한 질감의 얼굴상을 빚고, 안료와 금속 분말을 입히고 먹을 덧칠해 심연처럼 깊은 인간 정신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온갖 욕망과 감정의 회오리 아래로 고요히 내려앉은 의식의 밑바닥, 그 변함없는 심연을 형상화한 현자의 내면 모습이다.
포항시립미술관에서 1월부터 열리고 있는 김길후 작가의 개인전 ‘기념비적 인상’(4월3일까지)은 동서양 회화의 경계를 통섭하려는 날선 조형의지로 번득거린다. 양화 페인팅을 전공한 작가는 대구 화단에서 활동하다 2010년 이래 중국 베이징으로 터전을 옮겨 중국 근현대 대작 회화를 섭렵하며 동서양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현지 작업들을 추려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도 양화의 페인팅으로 전통회화의 재료인 먹을 흩뿌리며 암벽 같은 촉감적 이미지로 깨달음의 세계를 풀어낸 구도의 작품들이 대거 나왔다. 들머리의 대작인 ‘현자’ 연작들과 작가가 좋아하는 백합과 실존에 대한 단상을 풀어낸 ‘백합일기’ 연작들은 작가의 통섭적 화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깨달음을 표상한 돌부처 같은 얼굴을 배경으로 그라인더, 못 등을 써서 긋고 갈아낸 선과 짙은 먹빛으로 채워진 화면들은 강하고 단단한 질감과 물질성을 날것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강선학 평론가는 “표정 없이 격렬한 필치로 그린 특유의 얼굴상들은 작가의 의지가 세계와 만나는 몸의 제스처”라고 평했다. 23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도 ‘사유를 표현하는 힘’을 유난히 강조한다. “페인팅은 서양 남성화가들의 전유물 같은 장르지만, 중국에 가서 보니 현지 작가들은 페인팅 기법을 쓰면서도 중국 회화 전통인 거침없는 필력과 세필로 호방한 자기네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서양 작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자기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려야 합니다. 오랫동안 세월의 부침 속에 지혜를 쌓은 동양 현자의 사유를 담고싶었는데, 그런 고민이 거침없는 먹붓질과 부조, 긁어낸 선 같은 격렬한 표현으로 나타난 듯 합니다.”
그림 속 현자의 얼굴은 불길 속에 휩싸이면서도 평정심을 간직한 ‘영웅’의 풍모로 변주되기도 한다. 격정의 이미지를 내뿜으면서도 만져보면 돌멩이 같은 덩어리감이 느껴지고, 수묵화적인 일필휘지의 먹부림으로 반추상화된 영웅 형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동서양 회화의 경계를 돌파하려는 몸부림 같은 열정이 비친다. 중국에서 작업한 주요 작품들을 처음 국내에 대거 소개한 이번 초대전에 이어 작가는 다음달 대만 개인전을 준비중이다. (054)250-6023.포항/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