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1.31] 2005 관훈갤러리 초대개인전 김동기-오마이뉴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희망을 그리다

[인사동 주말 산책 11] 블랙 페이퍼 작가 김동기 展, 2월 2일까지 관훈미술관에서  

오마이뉴스 입력 2005.01.31 00:31l최종 업데이트 05.01.31 09:47 l 김형순(seulsong)

 

 

▲ 표정 없는 얼굴에도 희망의 모습은 역력하다. 어떠한 절망도 희망보다 더 클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보인다

 

 

아무 전망 없이 희망을 품다

 

 관훈 미술관 3층에서 오는 2일까지 초대전을 여는 작가 김동기씨를 처음 만났는데, 동안(童顔)이라 첫인상이 더욱 밝고 환하다. 일성이 노숙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들에게 어떤 것도 도와줄 수는 없지만 희망만을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아무 전망 없이 희망을 가지고 산다"라고 말을 잇는다. 그가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선이나 형상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불안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어떤 때는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의 희망이 아슬아슬해서 그런가 보다. 

 

▲ 부조리한 희망의 불꽃을 꺼지지 않는다. 잠을 못 잘 정도로 희망을 가지고 산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어떤 표정도 없이, 구체적 미래도 없이 간다

 그는 부조리의 언어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안 되어도 간다. 빛이 없어도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숨 쉬고 있는 한, 희망의 끈은 놓지 않는다." 희망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구체적 결과와 어떤 전제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 되어도 이루지 못해도 희망은 품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으냐고 물으면 "아직 죽지 않았기에 희망이 있다"라고 대답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이 초대전에 대한 홍보나 안내장을 보내는 데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해 봄직하다.


▲ 꽃을 뽑는다. 희망을 뽑는다. 결코 희망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결연한 모습이다

 

이해타산이 없는 희망을 그리다 


 작가는 위의 그림을 "꽃을 뽑고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꽃을 뽑는다는 것은 당연히 희망을 뽑는 것이다. 일체의 타산이 고려하지 않은 희망을 거두어들이는 몸짓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블랙 코미디 같이, 그 바탕색이 검다. 그에게 '블랙 페이퍼(Black Paper)' 작가란 별명이 붙은 것은 여기서 유래하는 듯하다. 재료도 검은 빛 섬광이 나는 아크릴 물감, 금속재료와 석채 등을 주로 쓰고 있다. 무상의 원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모델도 필요 없다.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착상들이 그의 그림의 대상이요,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 들어주는 관객 하나 없어도 혼자서 연주를 한다. 관객이 없다고 연주자가 연주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는다 

 

 작가는 위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연주자는 관객이 없어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만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어두운 공연장에서 혼자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마치 카뮈의 장편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 리외(Rieux) 의사처럼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고 않고 오직 페스트 퇴치를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할 뿐이다. 돌이 떨어지면 또 올리고, 굴려 내리면 또 들어 올리는 시지포스처럼 말이다. 


▲ 베케트의 주인공들이 고도를 기다리 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린다 

 

부조리 연극 같은 그림을 그리다


 그는 날마다 '고도'를 기다린다. 베케트가 말하는 '고도'라도 좋고 우리말의 고도(孤島)를 연상해도 좋다. 작가는 희망은 살아있는 자의 의무요, 살아있음의 감격으로 희망의 닻을 날마다 던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 해질 무렵, 어딘지도 모르는 황량한 시골길에서, 떠돌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구원의 힘이라도 되는 듯 고도를 기다린다. 부질없는 대사와 행위 없는 연기로 시간을 보내면서….


 작가는 바로 그런 반연극의 요소를 풍긴다. 현대인의 소통의 불가능함을 직감하고 그림으로나마 그 숨통을 트려고 한다. 그는 이런 인간 조건의 비참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는 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 막연한 기다림이 때로 구체적 기다림보다 더 풍성하고 넉넉한 힘을 가질 수도 있지만 

요즘처럼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는 홀대를 받거나 소외되기 싶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당신 같이 생각하는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를 작가에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일상의 일체에 대한 욕심은 없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여과없이 내보였다. 아침은 집에서 먹고 점심은 '보리밥 정식' 그리고 저녁에는 맨밥에 반찬 한두 가지로 식사를 한단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늘 성찬이 된단다.


 그는 마치 60∼70년대 목공이나 인부처럼 그렇게 간소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또 그는 "가장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이것저것 다 잘할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정신만은 늘 맑다. 그림에 대한 정신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 속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도 참 맑게 들렸다. 


▲ 방황하는 현대인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희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고 작가는 믿는다. 

 

5년 전에 맛본 인간에 대한 쓴 배신감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5년 전 맛본 인간에 대한 강한 배신감이란다. 그 충격에 깊은 고뇌와 갈등을 겪은 후 인간 실존의 본질을 접근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단다.


 초기에는 불면증으로 정신치료까지 받고, 졸도와 환청으로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아주 평온한 얼굴이다. 절망이 아무리 커보이는 경우라도 희망보다 더 클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넘쳐 있었다.


 그 전까지는 주변의 자연 풍광과 곤충을 주로 채색화로 많이 그렸단다. 그런 쓴 경험이 계기가 되어 40에 초반에 드디어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찾은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실존적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순수한 열정으로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리는 요즘엔 보기 드문 순애보적 사랑을 연상시킨다. 

 

사회에 대해 아무도 모르게 제동을 걸다

 

 작가는 그런 면에서 안하무인이다. 기존의 미학적 원칙이나 인과율을 무시하고 관객의 소통과 동화작용을 거부하고 행위도 비논리적이며 현대인의 지나친 성취감이나 효율성이나 능동성과 생산성에는 무심하다.


 심하게 말하면 재미와 소비를 우상으로 섬기는 현대인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속도문화와 효율만능의 사회에 파탄을 놓는 것이다.

 

▲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의 모습이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비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이 작가의 독자성이다 


 고집스런 고유 양식화를 발전시키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이 사회의 불신과 부조리와 싸우면서 혼자서 시지포스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편집증(偏執)적이라고 할 정도의 이런 그의 스토이시즘 요소도 최근 작품에서는 조금씩 변모하거나 개선되어 징조가 보인다. 선의 터치가 더 단순해진 것이다.


 부조리하고 절망적인 희망을 그리면서도 그의 그림 밑바탕에 어느덧 눈에 보이지 않게 그만의 정당성과 타당성 그리고 풍성함과 넉넉함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 이 작품은 최근의 수작이다. 더 단순화되면서 무의식적 세계까지도 담을 여지를 보인다.

무의식이라는 신대륙 발견한다면 그는 세계성과 현대성을 획득할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다면


 서울시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이나, 희망의 골목 안에서는 놓치기 쉬운 존재의 심연에 감추어진 무의식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단번에 현대성과 세계성을 획득한 더 큰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신대륙 발견은 바로 이 작가에게 하나의 과제이고 또 다른 하나의 희망봉이 될 것이다.

 

<참고>

[공지]2005 관훈갤러리 초대전 기사 스크랩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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