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5] 2024 길 후 작가 개인전…부산 아난티 컬처클럽 10월 1일까지 - 대구신문

 

[전시 따라잡기] 길 후 작가 개인전…부산 아난티 컬처클럽 10월 1일까지

대구신문 | 황인옥 기자 | 승인 2024.09.25 21:20

 

“예술가 역할은 영감으로 소우주 창조하는 것”


작품 1만6천점 불태워 타성 타개 드로잉 등 신작 총 70여점 소개 사후에 작품 1만점 남기려 작업

 

 



 

검은 화면에 눈부신 황금색 획들이 춤을 춘다. 맹수의 포효 같은 한 호흡으로 한 획의 붓 터치에 분출하는 기운을 가두자, 현실 너머 태고의 환희가 화면을 휘감는다. 부산 아난티 컬처클럽 길 후 작가의 개인전에 걸린 작품 ‘춤추는 피카소’다. “피카소가 하늘에서 제 그림을 내려다보고 좋아서 춤을 추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번전시에서 작가명을 성을 뺀 길 후로 개명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길 후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기나긴 작업 여정에서 시기마다 새로운 깨달음의 순간을 만나고, 새로운 서사들은 충만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치환됐다. 작업 속 명징한 인과관계와 서사는 작업의 진정성을 확보했고, 작업을 향한 그의 확신은 견고해져 갔다. 타성을 깨트리기 위해 1만 6천 여 점이라는 작품들을 불태우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줄 아는 특유의 뚝심은 작업의 정체를 막았고, 작업이 계속해서 진화하는 원동력이 됐다.


선 굵은 작업으로 확신에 찬 작업세계를 펼쳐온 그의 성정을 대변하는 작업은 ‘춤추는 피카소’다. 거장 중의 거장인 피카소를 자신의 작업에 소환한 용기도 예사롭지 않지만, “죽은 피카소가 저 세상에서 자신의 작업을 인정했다”는 작품 속 서사에선 “이것이 길 후!”라는 탄성을 내뱉게 한다.


‘춤추는 피카소’시리즈는 2년 전부터 시작됐다. 획과 획의 연동에 의한 추상이지만 “꽃을 들고 있는 남자”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조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작업이 구상으로 추상으로 변화한 것은 1만 6천여점의 작품들을 불태웠던 40여년 전인 1990년대다. 모든 변화에는 필연적인 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에게는 철학과의 만남이 분수령이 됐다. “현대미술이 철학과 연동되지 않을 경우 작가의 단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철학을 매개로 주관과 객관의 일치를 모색했다. 이런 움직임 이면에 진리에 대한 열망이 자리했다.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우주 창조주였다면, 예술적 영감으로 소우주를 창조해야 하는 예술가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진리’에 주목했어요. 진리는 곧 궁극의 세계, 최고의 순수를 의미했죠. 그것이 곧 예술이 가야하는 궁극의 본질이라고 여겼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을 예술의 근간으로 삼고 첫 발표한(2003년) 작업이 ‘검은 눈물(Black Rears)’ 시리즈였다. 검은 바탕에 빛을 머금은 인간의 형상을 그렸는데, 진리를 갈망하며 흘리는 간절한 남자의 눈물을 표현한 자화상이었다. 그는 예술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형이상학에 주목하고 플라톤과 사르트르, 들뢰즈 등의 걸출한 철학자들의 철학을 섭렵했고, 어느 순간 그의 입에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들”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 사유와 통찰들이 극도의 정제미로 시각화됐다.


진리를 자양분으로 내면에 속살이 차오르자 ‘비밀의 화원(Secret Garden)’ 시리즈가 잉태됐다. 꽃밭에서 환한 미소를 짓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서사가 무르익은 작품이다. ‘검은 눈물’이 진리를 향한 처연한 외침이었다면, ‘비밀의 화원’은 순수 세계로의 모색이었다. 순수라는 서사에 따라 화면은 변화했지만 여전히 실존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었다. “현상계에 발을 딛고 있어 순수와 굴레라는 상반된 감정들이 화면에서 교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의 성장통은 2010년에 찾아왔다. “세계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현자’와 ‘영웅’ 시리즈를 만났다. ‘검은 눈물’과 ‘비밀의 정원’이 깨달음을 갈망하는 실존이었다면, ‘현자’와 ‘영웅’은 깨달은 자에 대한 형상화였다. 2016년도 작업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실존과 실존 너머 진리의 세계를 갈구했던 앞선 작업들에 동서양 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추가됐다. 작품 ‘무제’ 연작은 그로부터 6년 후에 찾아온 변화였다.


2016년 이탈리아 전시를 계기로 “동서양의 융합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뇌리에 박혀있던 “예술이란 긴 인생의 이승에서 찰나의 순간에 저쪽 세계를 틈새로 보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예술에 대한 정의를 현실에서 경험하고는 망설임 없이 ‘무제’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이 시기 “어렴풋하게 저쪽 세계의 찰나의 순간을 본 것 같았다”고 했다.


‘궁극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진리를 깨닫는 것”이 난관이었지, 막상 미술적인 표현에서 만큼은 난공불락은 없었다. 그는 검정 화면에 일필휘지로 구현한 흰 선들의 구축으로 스스로 깨달은 소우주를 ‘무제’ 시리즈로 구현해갔다.


진리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업들은 이견없는 추상이다. 그러나 그는 ‘해체’라고 정정했다. “초월의 세계는 에너지의 세계인데, 에너지 속에 형태를 머금고 있어 추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이번 전시에선 구상 계열의 신작 ‘무제’를 출품했다. 전작과 비교하면 혁신에 가깝지만, 작업이 고착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그의 의지로 가능했다. 시간이 그의 삶과 함께 하고, 그의 내면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에 따라 작업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신작 ‘무제’는 흑연으로 자연 풍경을 묘사한 구상 계열의 작품이다. 화면 속 나무는 흑연으로 표현하지만 풍경의 배경에 색채를 적극 사용하며, 흑과 색의 대비에서 오는 초현실성을 적극 끌어들였다. “어린 시절 연필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시작한 작업입니다. 동심으로 그렸던 때의 기억 때문인지 사람들이 순수한 풍경이라고 의외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이번 개인전은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관통한다. 작업에서 걸림 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태도들이 여지없이 발휘됐다. ‘무제’나 ‘현자’ 등의 구작들에 새로운 서사들을 추가하며 끊임없이 작품에 새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작품 ‘비천’을 꼽는다. 오래 전에 발표했던 ‘무제’ 시리즈에 새롭게 반복적으로 색을 올렸다. 그러면서 부처상을 감싸는 신비한 빛이 위용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 첫 선을 보이는 흑연으로 그린 풍경인 ‘무제’ 시리즈에도 걸림을 두지 않는 예술적 태도가 반영됐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단 몇분이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10년이 걸리는 작업도 있습니다. 제 내면이 계속해서 변화하듯, 이미 발표한 작품들도 계속 진화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이죠.”


이번 전시에는 ‘무제’, ‘현자’, ‘춤추는 피카소’ 등과 드로잉까지 총 70여점을 소개하고 있지만 대부분 신작이다. 시리즈가 끝나면 새로운 시리즈를 시도하는 일반적인 방식인데 그는 그 모든 시리즈를 동시에 구사한다. “양극단에 있는 찰나와 영겁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한 이번 전시 제목 ‘불이(不二)’에 그의 작업 철학이 묻어난다.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든 영겁의 깨달음을 찰나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개념이 다른 다양한 시리즈를 동시에 구사하는 방식은 작가에게 큰 부담이다. “길 후 만의 비결이 있는지”를 묻자 “자아를 버리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코끼리를 그리겠다고 의식하면 코끼리로부터 멀어지고 그림을 망치게 됩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자아를 버려야 코끼리를 그려도 감동과 해석의 여지가 높은 코끼리가 나오는 법입니다.”


그는 태세전환에 능하다. 각 시리즈마다 출입문이 다르고, 각각의 출입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각 방에 맞는 내면상태를 갖추면 된다. 물론 이때 약간의 의식 정도는 필요하지만, 작업 전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내외적 내공은 필수다. “하나의 문으로 들어갈 때 육체적인 의식이 필요하고, 그 의식을 통해 각 시리즈에 맞게 내면화가 진행됩니다.”


그는 지독하게 작업만 하는 작가다. 피카소가 평생 1만점의 작품을 남겼듯, 그 역시 1만점의 작품을 목표로 두고 있어 한 눈을 돌릴 틈이 없다. “피카소가 1만점의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전시에는 미발표작들이 전시됩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있는 작가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죠. 저 역시 사후에서 살아있는 작가로 남고 싶어 1만여점의 작품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참고>

[전시 따라잡기] 길 후 작가 개인전…부산 아난티 컬처클럽 10월 1일까지 - 대구신문 (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