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1.07] 2026 길 후 작가 개인전…인간이 닿고자 하는 궁극의 상태 숭고함 화면에 호출-대구신문 |
[전시 따라잡기] 길 후 작가 개인전…인간이 닿고자 하는 궁극의 상태 ‘숭고함’ 화면에 호출
대구신문 | 기자명 황인옥 | 입력 2026.01.06 21:16 수정 2026.01.09 14:14
부산 영도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원지’ 100년 된 보세창고에 작품 전시
1485㎡ 압도적 규모는 여백 작용 초기 작품·대형 신작 등 100여점 40여년 일관 ‘인간에 대한 탐구’ 얼굴 눈·코 지워 감정·개성 제거
길 후(본명 김길후) 작가의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가 열리고 있는 전시 공간인 부산 영도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원지는 100년 된 보세창고의 원형을 보존한 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선박이 접안하는 항구 바로 앞에 자리해 있어 거친 산업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벽면과 구조물, 1천485㎡에 이르는 압도적인 규모는 공간 자체만으로도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이곳에 작품을 거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한다. 웬만한 기운이 아니고서는 공간에 작품이 잠식된다.
그러나 길 후의 작업이라면 상황은 역전된다. 거칠고 냉정했던 산업 공간은 더 이상 작품을 압도하는 배경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그 대신 깊은 사유를 촉발하는 장(場)으로 변모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보세창고의 투박한 질감과 넓은 공백은 오히려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여백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의 작업의 근간에 놓인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사유 때문이다. ‘숭고함’이라는 개념 앞에 공간을 둘러싼 환경 정도는 형이하학일 뿐이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이번 전시에 초기작 일부와 대형 평면 신작 등 100여 점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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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후가 지난 40여 년간 일관되게 파고든 대상은 ‘인간’이다. 물감이든, 흑연이든, 어떤 물성으로 표현하든, 그의 화면에는 인간이 중심을 잡는다. 예술가의 시선이 우주의 질서나 물질의 기원, 추상적 개념, 혹은 사회 구조와 같은 비인격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는 한결 같이 인간에 주목한다.
일견 외골수처럼 보일 만큼 집요하게 인간을 탐구의 대상으로 여긴 그의 선택 이면에는 ‘공감’이라는 개념이 자리한다. “인간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인간이 우주의 질서나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은 추상적인 사유나 관념적인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을 탐구하는 것은 타자를 바라보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겸합니다. 제게는 인간에 대한 탐구야말로 경험과 공감이 축적되는 가장 직접적인 인식 방식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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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후가 인간을 예술의 중심에 두는 태도는 감정적 선택보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유의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인간’은 하나의 소재이기보다 세계를 해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며,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이해와 공감의 최대치가 응축된 지점이었다.
그가 인간을 그리는 방식은 모호함이다. 눈이나 코, 입술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는 인물에서 사회적 역할을 제거하려는 의도의 발로다. 그 결과 화면 속 인물에서는 그 어떤 서사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에서 강력한 존재감이 배어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단순한 초상화의 대상이 아닌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근저에는 ‘인간의 숭고함’이 자리한다.
길 후가 사유하는 ‘숭고함’은 종교적 이상이나 도덕적 완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실패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수행자, 즉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불완전하게 태어났지만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간의 삶을 ‘숭고함’으로 치환한다.
“구도자가 자아를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으며 끝없는 질문 속으로 들어가듯, 모든 인간은 삶의 순간순간 끊임없이 탐욕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저는 그런 삶의 과정에서 숭고함을 발견합니다.”
화면 속 얼굴에서 눈·코·입이 지워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고도 전략이다. 특정 감정과 개성을 제거함으로써, 화면 속 인간은 개인을 넘어선 존재로 확장된다. 이때 인간은 작가 자신도, 특정 타자도 아닌, ‘인간이라는 조건’ 그 자체로 남는다. 이 초월적 인간상이 바로 길 후가 말하는 ‘숭고한 인간’이다.
이번 전시 제목 ‘무량대수(無量大數)’이라는 개념에 그가 도달하고려는 인간의 경지가 녹아있다. 무량대수는 숫자라기보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개념이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다. 그는 인간의 외형이나 개성을 드러내는 대신,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내 닿고자 하는 궁극의 상태, 다시 말해 ‘숭고함’을 화면에 호출한다.
“이번 전시는 제가 오랜 시간 붙들어 온 질문, 즉 인간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제가 탐구하는 것은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 숭고함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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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과정서 작업 의도 배제 노력 의도·계획 좌절 때 오히려 ‘진짜’
깊이감 획득 위해 대형 작업 선호 도전 두려워 않아 재료·형식 다채
길 후의 작업에서 급진적인 태도도 발견된다. 작업에서 자신의 의도를 제거하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그는 창작 과정에서 창작자의 의도 개입을 최대한 배제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창작물조차 걸림 없는 자유를 누리기를 염원하는 의도가 자리한다. “작가의 의도와 욕망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작품은 설명 가능한 대상이 되고 초월성을 잃게 됩니다. 저는 그런 작품을 원치 않습니다.”
그의 작업에서 실패는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요소가 된다. 그에게 실패는 작가의 의도, 즉 자아가 작동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인식 이면에는 자신의 의도한 형상이 무너지고, 계획이 어긋난 틈에서 더 생생한 이미지가 태어났던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의도가 실패한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거듭 강조한다. “의도가 무너지고, 계획이 좌절된 자리에서 오히려 진짜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저의 생각이 완전히 관철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작품은 하나의 의미로 굳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작업의 실패는 자아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자아의 배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의 극도의 통제 이후에 허용된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의도를 제3자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역량이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펼쳤다.
길 후는 대형 작업을 선호한다. 규모가 보장될 때, 깊이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정 규모를 유지한다. 이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물감의 중첩이라는 극단적인 물성을 동반하게 되는데, 그에게 물성의 중첩은 “시간의 축적”을 위한 방편이다. 붙이고, 말리고, 깎아내는 끝없는 과정 속에서 시간은 축적된다.
물성을 통해 형상을 만드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과정이다. 끊임없이 물성을 올리고, 조정의 연속을 지나가야 한다. 그는 “끊임없는 조정의 과정에서 인간의 심오함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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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재료와 형식의 다채로움이다. 전시장에 걸린 그의 작품들에서 다양한 물성과 화풍들이 오고간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향이 이끈 결실들이다. 그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숭고함’을 올곧게 견지하지만, 형식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물감과 흑연 같은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드로잉부터 짙은 회화성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에는 회화적 접근, 물질의 축적, 표면을 다루는 작가의 반복 행위들이 살아 움직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와 물감 대신, 종이와 흑연으로 그린 화풍을 새롭게 선보인다. 45년 만에 다시 시작한 연필 드로잉이다. 이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연필과 종이는 가장 단순한 도구이며, 가장 솔직한 재료다. 색도, 물성도 없고, 오직 선과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는 연필 드로잉을 통해 다시 초심자로 돌아간다.
연필로 종이 표면에 검은 선을 반복해 중첩하는 과정은 명상에 가깝다. 까맣게 메워진 화면은 어둠이 아니라 사유의 밀도를 드러낸다. 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키는 인체, 사유의 방을 떠올리게 하는 고요한 분위기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 드로잉은 제게 또 하나의 수행 방식입니다.” 전시는 2월 2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참고>
[전시 따라잡기] 길 후 작가 개인전…인간이 닿고자 하는 궁극의 상태 ‘숭고함’ 화면에 호출 < 전시 따라잡기 < 미술 < 문화 < 기사본문 - 대구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