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27] 2008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닥터 지바고(1965) - 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닥터 지바고(1965) 

매일신문 | 김중기 기자 | 입력 2008-12-27 06:00:00 수정 2008-12-27 06:00:00 

 

 

▲라라의 정원, 100x71, Acrylic Ink on paper, 2008


 동토(凍土)의 땅을 덮은 눈이 녹으면서 노란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한들거리는 꽃들 속에 연한 흰 꽃도 보인다청명한 하늘과 자작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한 남자가 서 있다깊은 눈의 시인지바고이다신비로운 자연의 힘에 매혹되어 눈이 깊이 흔들린다너무 고귀한 모습에 감동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이때 러시아 전통악기 발랄라이카의 선율이 흐른다구슬이 굴러가는 듯 경쾌하다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봄의 환희그리고 사랑의 달콤함이 한꺼번에 묻어온다모리스 자르의 명곡 '라라의 테마'이다.

 

 '닥터 지바고'는 금세기 최고의 대하 로맨스 영화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거친 격동 속에서 피어나는 지바고와 라라의 러브스토리가 애절한애련의 영화이다압제의 시기와 제1차 세계대전그리고 혁명으로 이어지는 서사적인 전개에 시처럼 아름다운 서정적인 로맨스가 어울려 기가 막힌 영혼의 화음을 자아낸다.

 

 '닥터 지바고'는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세련된 문체와 철학적인 깊이로 '소설로 쓴 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련 반세기만에 처음 나온 문학작품'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당시 공산당 치하에서 출간이 금지됐다이후 원고가 서방으로 반출돼 출간되고, 195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지만 이 또한 소련정부의 저지로 수상이 거부됐다.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닥터 지바고'는 1994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상영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혁명기를 살아온 동시대인들을 위한 일종의 '빚갚음'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역사 속에 놓인 한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얘기이다.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이집트계 배우 오마 샤리프에게 타이틀 롤을 맡겼다그는 상처받기 쉬운 감성과 순결한 지성을 가지고 두 여자 라라와 토냐를 모두 사랑하는 복잡한 심정의 지바고를 훌륭하게 연기했다특히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눈빛 연기는 일품이었다.

 

 눈과 얼음이 뒤덮인 저택에서 라라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지바고의 눈빛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라라의 썰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지바고는 2층으로 뛰어올라가 유리창을 깨고 라라의 마지막 모습을 응시한다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눈빛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흔들리며 맺힌다.

 

 시인 박미영은 설원 속에 갇힌 저택을 둘러싸고 울어대는 늑대떼들의 슬픈 울음소리 같은 시를 썼다바짝 언 호수창문에 두텁게 끼어있는 성에흔들리는 촛불 속에 침잠한 채 '제 몸 속 굴을 파고 웅크린유리 지바고의 불안한 사랑을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짐승은 어느 순간 '위험한짐승이 되고결국에는 '나쁜 이름'의 짐승이 되고 만다오래된 질병처럼 날개 떨어진 자들의 가슴에 흘러내리는 밀랍이란 대목은 전차에서 내려 라라를 잡으려다 숨이 막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지바고의 슬픈 사랑의 결말을 보는 듯해 가슴이 아린다.

 

 화가 김동기는 자작나무 숲 속 동화 같은 이미지를 그렸다흰 눈이 꽃향기처럼 흩날리는 숲 속에 라라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그녀를 잡기 위해 지바고가 뛰어간다어둡고 캄캄한 밤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도 자작나무는 그렇게 울었다.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도록 절실한데 잡을 수 없다니이건 꿈이야현실이 아니야그러나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 사랑을 놓친다숨을 거두며 지바고가 본 마지막 이미지가 바로 이 그림이 아닐까./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닥터 지바고 (Doctor Zhivago, 1965)>

 

줄거리:그로메코가의 딸 토냐(제랄딘 채플린)와 장래를 약속한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 1912년 겨울밤, 크렘린궁 앞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의학을 공부해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그는 운명의 여인 라라(줄리 크리스티)를 만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동원된 그는 라라를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빨치산에 잡혀 강제 입산을 당한 유리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전차 밖으로 지나가는 라라를 보고 황급히 뛰어가다 심장마비로 절명한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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