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6] 2021 무겁고 빠르게 스친 ... 흔적 내가 그리는 게 아닌 붓이 그리는 것-이데일리 |
무겁고 빠르게 스친 15cm 평붓의 흔적 "내가 그리는 게 아닌 붓이 그리는 것"
이데일리 입력 | 오현주 기자 | 등록 2021-07-26 오전 3:30:01 수정 2021-07-27 오전 11:09:27
학고재갤러리서 개인전 '혼돈의 밤' 연 작가 김길후
中 오가며 활동... 작가상 계기 국내조명
기존 작품 1만6천점 불태우고 개명 뒤 "옛 흔적 지우고 새롭게 시작"
결심도 주저없이 일순간에 담는 속도감 핵심 / 200호 넘는 검은 화폭, 장중함 온전히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빠른 무게감’이라고 해두자. 이미 말은 안 된다. 빠른 건 가볍다는 통설 타령이 아니다. 가벼워야 빠를 수 있다고 우기는 건 더더욱 아니고. 진중한 밀도감은 속도의 통제를 받지 않더란 얘기다. 한없이 무거운데도 빠르게 옮겨간 붓질이 신기하더란 얘기다. 그림과 마주한 첫인상이 그랬다. 칠흑같이 검은 바탕에 오로지 넓고 좁은 붓길로만 고단했을 화업의 시간을 얹어내고 있었다.
그래선가. 작가는 대뜸 나이 얘기부터 시작했다. 이럴 경우, 대개는 둘 중 하나가 아니겠나. 서열을 매겨 줄을 세워야겠다고 작정을 하거나 그 세월이 담아낸 성과를 강조하려거나. 그런데 그 분위기와는 또 결이 달랐다. 다른 색감이 보인다고 할까. 다른 질감이 닿는다고 할까. “회갑을 맞았다”고, 그래서 “이번 전시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예술이 뭔지가 항상 궁금했다. 그래서 돌아다녔다. 중국으로,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이번 전시가 그 해답이 될 것 같다.”
작가 김길후(60). 그의 이름이 국내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지난 4월이다.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하며 ‘새삼’ 조명을 받았더랬다. 당시 선정위원과 심사위원으로부터 “김길후의 강력함은 거침없는 필선의 속도에서 나온다”며 “작가의 필선을 가로막을 표현의 필법조차 그를 막아서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붓이 머금고 있는 물감 묽기는 스스로도 흘러내릴 듯 자유롭고 작가의 붓길도 거침없이 해주고 있다”며.
그런 작가를 한국 미술계가 서먹해 했던 건 그의 ‘넓은 발’ 때문이다. 2010년부터 작가는 한국과 베이징 스튜디오를 오가며 평면과 조형, 영상과 퍼포먼스 등 광폭한 작품세계를 펼쳐왔더랬다. 굳이 한국의 미술판을 위한 제스처가 따로 필요없었던 거다. 거기에다 말이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스스로 거스르기도 했다. 1999년 작품 1만 6000여점을 불길 속에 내던져버린 일이다. 4년 뒤에는 이름도 바꿨다. 지금의 김길후는 태어날 때부터 써온 ‘김동기’를 개명한 것이다. 결코 쉬웠을리 없는, 정체성을 싹 갈아치우는 비장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하나다. “예전 흔적을 다 지우자,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
이후 작가의 작업은 그 실현을 위한 지난한 도전이고 실험이었을 거다. 그러곤 마침내 그 답을 찾았다는 거 아닌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 연 개인전 ‘혼돈의 밤’은 그 집약체다. 과정과 풀이까지 곁들인.
당장 그 답부터 확인해보자. 세상을 떠돌고 작품을 태우고 개명을 하고 그렇게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림에서 나를, 자아를 빼내야 하는 게 답이더라. 자아를 지우고 그림에 몰두해야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붓이 그리게 해야 하는 거다.”
왜 그래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세상에, 예술이라도 내 뜻대로 가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감동을 억지로 조장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붓을 조작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다 내려놓고, 보는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믿는다.”
알 듯 모를 듯한 이 말을 좀 쉽게 풀어보자면 이런 거다. 내가 그리는 대상도 신경쓰지 말고, 작품을 사갈 수도 있는 상대도 의식하지 말고, 가장 순수한 자세와 마음으로 그리는 일 자체에만 몰입할 것. 생각도 하지 말고, 쉬지도 말고, 한순간에.
이 작업을 위해 그가 고안한 게 바로 속도감이다. 폭이 15㎝에 달하는 평붓 하나로 아크릴물감의 색을 바꿔가며 순식간에 붓길을 낸다. “절묘하게 물감이 흘러내리기도 하지만 흘러내리는 시간마저 주지 않게 일순간에 깊이를 담아내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형체를 잡는 일 따윈 없다. 가령 그림 속에 눈이 보인다고 눈을 그려넣은 게 아니란 뜻이다. 그저 붓이 지나가고 나니 그 자리에 눈도 있고 바람도 불고 구름도 머물더란 얘기다. “붓으로 그리는 게 아니고 치고 나가는 거다. 그래서 자주 붓이 부러지기도 한다. 그만큼 빠른 속도감이 중요하다.”
나 떠난 그림…자아 지워버린 일필휘지
전시작은 딱 한 점, ‘노자의 지팡이’(2019)란 타이틀의 조각을 제외하곤 모조리 ‘무제’란 작품명을 가졌다. 2021년 제작한 회화 20점을 걸고(2014년 작품이 한 점 끼어있다), 조각 2점을 더 세웠다. 회화작품은 200호(259×194㎝)를 훌쩍훌쩍 넘긴 대작이 즐비한데, 화이트큐브를 되레 겁주는 검은 화폭이 거대한 벽처럼, 문처럼 걸려 있다.
원체 대작이 주된 작업이란 게 갤러리 측 귀띔이다. 캔버스에 몸을 던지다시피 그리는 작업방식이라 되레 작은 작품을 더 어려워한다는 거다. 그 작품들 중엔 2013년에 시작해 최근에 완성한, 7년여를 소요한 ‘무제’(2021)도 보인다. 300호(290.9×218.2㎝) 규모의 작품은 3m에 달하는 높이도 높이지만 70㎏쯤 된다는 무게도 만만치 않단다. 절반은 물감의 무게로 보인다. 여느 작품과는 달리 두툼한 물감더께가 부피감을 부른다.